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장진호 전투 (문단 편집) === 12월 8일 이후 === 고토리 탈출 작전은, 앞서 유담리/하갈우리 탈출 작전처럼 이번에도 7연대가 선도하는 것까지는 동일한데, 고토리 방어만은 새롭게 합류한 1연대 2·3대대가 담당하게 되었다. 그동안 후위만 담당하던 5연대는 그 임무에서 해제되어 중간에서 이동할 수 있었다. 진흥리 1연대 1대대는 황초령까지 마중 나오기로 했다. 기존 1대대 담당 구역이던 진흥리 철도야적장은 미 육군 3사단 대대급 Dog 특수임무부대가 담당하기로 했다. Dog 특수임무부대와 교대한 1대대는 새벽 2시에 이틀 치 식량을 갖고 황초령을 감제할 1081고지로 출발하였다. 그런데 그곳은 이미 중공군 60사단이 점령하고 있었다. 이날 전에 없었던 폭설이 몰아쳤는데, 덕분에 중공군 눈에 띄지 않고 10 km를 행군하여 그들에게 접근할 수 있었다. 단점이라면 경사지를 올라가던 병사 1명이 발을 잘못 디뎌 인간 썰매처럼 아래쪽으로 미끄러져 내려가면 전체 분대가 함께 쓸려 내려갔다는 점이다. 1081고지 전투에서 중공군과 교전하여 피해를 입었지만, A중대는 밤사이에 무려 67명이 동상을 입었고, 그 중 7명이 발을 절단할 정도로 엄청난 비전투 손실을 입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콜세어 항공 지원에 힘입어 다음날 정오쯤 1081고지를 탈취했다. 고토리에서 출발한 최선봉 7연대 B중대는 이날 전투를 포함하여 거듭된 전투로 병력 180명 중 27명이 남았다. 진격이 순조롭지 않자 연대장은 7연대 3대대에게 예비대를 투입하라고 했지만, 3대대에는 완전편제 1천명 중 G중대 50명, H중대 40명, I중대 30명 등 120명이 남아있었을 뿐이었고 이미 전부 전방에 투입된 상태였다. 즉 예비대가 없었다. 7연대 2대대 D·E중대는 이미 12월 1일에 작살나 5연대에 3대대에 배속된 상태였다. 12월 9일 황초령 고개마루의 도수장을 점령하기 위해 “B중대는 1개 소대를 투입하라”고 명령받았지만, “중대 총원 중 남은 병력은 반개 소대밖에 안 된다”고 보고하였다. "그래도 그냥 공격하라"라는 명령에 할 수 없이 전체의 절반인 14명을 C중대 일부 병력과 함께 투입하였다. 다행히 도수장에는 얼어 죽어가는 중공군 25명밖에 없었다. B중대는 이들을 모두 사살하고, 뒤이어 항복하러 온 중공군 몇 명은 극도로 피곤하여 엉덩이를 땅에 붙이고 앉은 채로 대충 몸수색을 하고 접수할 수 밖에 없었다. 이어 도수장은 항복하러 온 비무장 중공군 다수에게 포위되었다. 어쨌든 황초령 고개마루의 끊어진 '''수문교''' 양쪽이 이로서 확보되었다. 이제 헌병대에게 경호를 받으며 육군 58 답교중대가 공수투하를 받은 트레드웨이 교량부품을 싣고 나타났다. 막 다리를 설치하려고 하는데 새로운 문제가 발생하였다. 준비한 부품은 7m였는데 끊어진 다리는 9m였던 것. 이에 중공군 포로를 시켜 철도 침목을 날라 돌출부에 목재 받침을 설치하는 것으로 해결하였다. 그런데 이번엔 모래주머니가 부족하여 다리 하중을 지탱할 밸러스트를 형성할 수 있었다. 이 문제는 사방에 깔려 있는 중공군 시체를 다리 하부 구조에 집어 넣어 해결 하였다. 얼어붙은 시체들은 교량 무게를 충분히 견딜 수 있을 정도로 튼튼하였다. 이로서 작업을 시작한지 3시간 후인 오후 3시 30분 다리 사용이 가능해졌다. 이 다리로 미군 1만 4천명과 차량 1천400대가 넘어갈 수 있었고, 다수의 피난민들도 함께 했다. 워낙 중요한 다리라 미 육군 제50대공포 대대가 경비를 지원하였다. 다리가 완성되어 해병대가 막 건널 때 1연대 1대대의 1081고지 전투도 끝났다. 고지에는 중공군의 시신 500여 구가 널려 있던 것이다. 덕분에 해병대는 1대대의 엄호 아래 순조롭게 철수하였다. 이번 후퇴 작전에도 어김없이 육군은 측면 엄호를 포기하고 도로까지 내려와 행군종대에 끼어가는 추태를 보여줬다. 이에 5연대 3대대장 테플렛 중령은 “무슨 문제 있냐”는 육군 임시대 지휘자 앤더슨 중령에게 "너희들 같은 쓰레기 군인들이 우리 측면에 있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에 우리가 알아서 하마."라고 외쳤다. 마지막으로 남은 고토리 부대는 미 해병, 미 해군의무병, 미 육군, 영국 해병특공대 시신 117구를 매장하면서 철수하였다. 그리고 고토리는 폭파되었다. 1연대 수색중대원들이 전차 10대를 호위하며 최후방을 지켰다. 처음에는 피난민들을 접근하지 못하게 하는 일만 하다가, 나중에는 중공군이 오자 승무원들은 전차를 버리고 튀었고, 수색중대원들만 결사적으로 싸우면서 마지막으로 황초령 답교를 건넜다. 그 시간이 12월 11일 오전 2시 30분이였다. 몇 시간 동안 홀로 남아 있던 해병 공병대는 그제야 안심하고 답교를 폭파시켰다. 이 때 답교 폭파로 장진에서 빠져나오던 피난민들은 단 1명도 그곳을 나오지 못했다.[* 통역장교 이종연은 이후 오랫동안 [[함경남도]] [[장진군]] 출신으로 월남한 [[실향민/대한민국|실향민]]을 찾아 다녔으나, 전부 장진호 전투 이전에 빠져 나온 사람이었고 피난민들 중 살아 나온 사람은 없었다.] 해병대가 산악지대를 벗어나 막 진흥리에 도착하려고 하는데 갑자기 대포와 박격포 포탄 세례, 저격병의 사격이 쏟아졌다. 알고 보니 미 육군 3사단이었다. 이에 해병대의 육군 혐오는 극에 달했다. 이때의 육군 부대는 미3사단 65연대 2대대 Dog TF로 푸에르토리코 인들이었다. 이들은 후위를 지키기 위해 가장 마지막까지 남아 싸웠다. 그리고 산악지대를 벗어나니 신기할 정도로 따뜻해 졌다. 단점으로 얼어 붙어 있던 상처들이 녹아 피가 터지기 시작했지만, 그래도 해병대원들은 행복해 하였다. 해병들의 머릿속은 함흥-흥남에 강력한 방어진지를 구축하여 겨울을 난 후 반격할 생각에 가득차 있었다. 후송되는 부상자들도 그때의 반격에 참가하기 위해 자기를 빠트리지 말아 달라고 애원 하였다. 마침내 해병대원들은 유담리를 떠난 11월 27일부터 14일간 140km의 혈로를 뚫고 흥남까지 철수 작전에 성공한 것이다. 같은 날 제10군단은 한반도 동북부에서 완전 철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현재 남은 병력은 총원 10만 5천명에 전차 및 기타 차량 1만 7,500대였다. 병력은 중공군을 약간 상회하였고, 압도적인 기갑/항공 전력에 보급까지 빠방했지만, 병사들은 전의를 상실한 상태였다. 무엇보다 도쿄에 있는 맥아더가 싸움을 포기했다.[* 나중에 밝혀지지만 동부전선의 중공군은 완전히 [[개발살]]나 있어서 더 이상 싸울 수 없는 상태였다.] 미군은 이들을 후퇴시키고자 정규항모 4척, [[경항모]] 1척, [[호위항모]] 2척을 배치했다. 화력지원용으로 중순양함 2척, 구축함 6척, 로켓함 3척이 배치되어 총합 2백 척이 [[됭케르크 철수작전]] 이후 최대규모로 해상철수작전을 수행하였다. 미 1해병사단이 장진호에서 사투를 벌릴 때, 그보다 북쪽에 있던 미 7보병사단과 한국군 1보병사단은 큰 방해를 받지 않고 철수할 수 있었다. 미 1해병사단이 철수할 때는 미 3보병사단이 후위를 맞아 엄호하였다. 그러나 중공군은 장진호 전투에서 이미 사실상 괴멸한 상태라 쫓아오지 못해 이렇다 할 전투가 없었다. 심지어 다음 달에 벌어지는 중공군 3차대공세에 동부전선 중공군 12개 사단 전체가 참여하지 못했다. 당시 서부전선 중공군의 18개 사단만 참가한 3차 대공세에, UN군은 서울까지 빼앗기며 작살났는데,[* 일단 도쿄사령부 [[더글러스 맥아더]]가 전의를 상실하여 싸움을 포기한 상태라 무질서하게 일방적으로 도주하는 상태였다.] 만약 동부전선 중공군마저 3차 대공세에 참가했다면 UN군은 훨씬 위태로웠을 것이다. 해병대는 12월 15일 흥남 부두를 떠났고 [[한국군]]은 물론 피난민 10만 명과 동승하였다.[* 미군의 방어선 안에 있던 피난민 9만 1천 명은 안전하게 후퇴하였지만, 방어선 밖에도 피난민 약 10만 명이 미군을 따라 이동했다고 한다. 게릴라 침투 위험 때문에 방어선 밖의 피난민은 안으로 들어올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들 방어선 밖의 피난민들은 결국 [[흥남 철수작전]]의 그 순간까지 제지당해 탈출에 실패했다. 이런 엄청난 피난민이 발생한 이유 중 하나가 “미군이 핵공격을 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아 너도나도 대피하려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실제로 국군 병사들이 흥남시내 집집 마다 문을 두드리며 핵이 떨어지니 탈출하라고 하였고, 맥아더도 핵을 쏘고 싶었는데 [[미국 정부]]에서 막았다.] 전차의 경우 미 해병 1사단의 경우 M26 85대와 M4 12대를 가지고 장진호로 진격하였으나, 흥남 철수 때는 M26 69대와 M4 5대만 LST에 실려 철수 할 수 있었다. 이들 해병대는 12월 15일에서 17일까지 부산에 도착하였다. 12월 24일 흥남항에 남은 마지막 병력인 미 육군 제3사단 직할 제10공병전투대대와 미 해군 [[UDT]] 3팀 소속 UDT 1개 분대(8명)가 흥남 부두를 대폭발로 날려버려 황무지가 되었다. [[흥남 철수]] 항목 참조. 그리고 미 보병 31연대와 32연대 1대대도 후방으로 이동하여 재편성 작업을 하였다. 10군단은 해체되어 버렸고, 해병1사단은 미8군 예비부대가 되었다. 이들은 다음해인 2월 18일에 가서야 전선에 복귀할 수 있었다. 9병단 중공군은 3월에서야 전선에 복귀하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